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3대 대통령 선거 (문단 편집) === 지역별 분석 === 1985년 [[12대 총선]] 때의 득표율과 비교해보았을때 호남에서 민정당의 득표율이 전국 평균 수준에서 각각 한자릿수대와 10%대로 20~30% 가량 빠졌고, 민정당이 총선 당시 전국 최대 득표율 56%를 올린 충북에서도 11% 가량 득표가 빠졌으며 충남에서도 마찬가지로 13% 가량 득표율이 빠졌지만, 수도권에서 안보심리가 작용하여 예상보다 득표를 많이 가져갔다.[* 일례로 12대 총선 당시 서울에서 민정당의 득표율이 27%에 그쳤는데 노태우 후보는 30%를 얻었다.] 게다가 서울과 TK 이외 지역에서 구 국민당[* 민주공화당 계열, 즉 박정희 계열의 정당이다. 김종필과 가장 성향이 비슷하다고 볼 수 있으나 사표심리로 인해 노태우 쪽으로 표가 쏠리게 되었다.]의 표를 상당수 흡수하였으며, 거기에 더해 12대 총선에서 민정당 득표율이 44%로 과반을 넘기지 못한 경북이나[* 국민당과 합치면 61%에 달했다.], 신민당이 민정당에게 근소하게 우세했던 대구에서도[* 당시 대구 총선에서 민정당은 28%의 득표율을 올려서 약 30%의 득표율을 올린 신민당에 근소하게 뒤졌다.] 양김 분열에 대한 실망과 지역감정 등이 겹쳐져 6.29 선언 직후의 재야의 예측을 완전히 뒤엎고 기어이 각각 66%와 70%를 넘는 득표를 거두는 압승을 거둠으로써 판세를 확정시켰다. 즉, 판세를 전반적으로 살펴보면 호남표와 충청표가 여권에서 대거 이탈하여 야권을 지지했지만, TK표의 극적인 결집과 강원도, 경기도, 인천, 경남 등지에서 국민당 표의 부분적인 흡수가 이뤄지며, 이를 통해 호남표와 충청표의 대규모 이탈을 효과적으로 상쇄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네 후보 중 김종필이 표 손해를 많이 봤다고 할 수 있다. 앞서도 말했지만 김대중 후보를 탈당과 독자출마로 몰고 간 일명 '''4자 필승론'''도 대선 개표가 시작되자 '''처참하게 부숴졌다'''. KAL기 테러 참사 직후였던지라 보수 계층 표가 결집하여 상당수 지역에서 노태우 후보가 앞설 수 있었다. 노태우 후보는 대구, 경북 이외에도 경기, 인천, 강원, 충북, 제주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특히 경기도에서 1,204,235표(41.44%)를 득표하여 타 후보들에 비해 우세한 결과를 낳았고[* 이 때의 경기도는 서울보다 인구가 훨씬 적었기는 했지만, 김영삼과 40만표, 김대중과 55만표라는 꽤 큰 표차를 냈다. 이는 각 후보들의 연고지(영호남, 충남)를 제외한 지역들 중에서는 가장 큰 표차로서, 노태우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김영삼 후보의 연고지인 경남에서도 792,757표(41.17%)를 득표하는 선전을 했다.[* 김영삼 후보는 고향인 [[거제시|거제]]에서 74%의 득표율로 압살했고, 남해안권인 [[통영시|통영, 충무]]와 도시화가 진행된 [[마산시|마산]], [[창원시/통합 이전|창원]], [[진해시|진해]], [[진주시|진주]], [[김해시|김해]]에서는 50~65%의 득표율로 타 후보를 크게 따돌렸다. 그러나 [[울산광역시|울산]], [[밀양시|밀양]], [[양산시|양산]]에서 접전이 떴고, [[거창군|거창]]을 제외한 농어촌 지역에서 노태우 후보에게 8~19%p가 밀리면서 경남에서 예상보다 재미를 보지 못했다. 특히 [[전두환]] 대통령의 고향인 [[합천군|합천]]에서는 경상북도와 비슷하게 노태우 후보가 68%라는 득표율을 기록했다.] 마찬가지로 노태우 후보는 TK 지역에서 68.1%를 득표했으나, 나머지 TK표는 반대로 김영삼 후보가 제법 가져갔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호남에서 90% 가까운 득표를 한 김대중 후보만큼 한 지역권내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진 않았다. 한편 노태우 후보는 충청북도에서도 김종필 후보를 누르고 승리했는데, 김종필 후보는 충남에서만 691,214표(45.03%)로 압승을 거뒀을 뿐 충청북도에서는 김영삼 후보에게도 밀리는 수모를 당한다. 실제로 PK가 주요 지지기반이던 김영삼은 50~60% 정도의 표밖에 얻지 못했다. 김영삼이 PK에서 70~80% 정도로 압도적인 지지를 얻을 것이라 예측했던 김대중측의 생각이 빗나간 셈. 그리고 대구에서도 김영삼이 27만여 표(25%)로 표를 나름 잠식했지만 YS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에서도 노태우가 무려 64만여 표(32%)를 얻으면서 상쇄되어버렸다. 특히 대구에서 예상을 깨고 노태우 후보에게 몰표가 나온 것은 당대에는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었다. [[12대 총선]] 당시 신한민주당이 29.7%로 득표율 1당을 차지한데 반해서 민정당은 겨우 28.3%를 획득하는데 그쳤던데다가 신민당과 민한당의 득표율을 합치면 48.2%로 전국 평균과 비슷했고 민정당과 국민당의 득표율을 합쳐도 43.9%로 밀릴 정도로 야권 성향이 대구에 어느 정도 있었는데 지역감정의 발호와 양김의 분열 앞에서 야권 성향이 쏵 사라지다시피 했기 때문이었다. 호남맹주 김대중 후보가 승부를 걸었던 수도권의 경우, 최대 승부처답게 예상이 어려웠으나 결과적으로 [[경기도]]와 [[인천광역시|인천]]을 노태우 후보가 차지했다. 최대 인구를 가진 서울의 경우 세 후보 각각 혼전을 벌였으나 결국 김대중 후보가 [[성북구]], [[종로구]], [[관악구]] 등 대부분의 지역에서 승리를 거뒀으며[* 특히 호남 출신 노동자들의 비율이 높은 [[금천구]], [[관악구]], [[구로구]] 등 서울 서남부 지역에서 지지를 많이 받았다. 이들 지역은 현재도 [[민주당계 정당]]의 텃밭으로 분류된다.], 김영삼 후보의 경우 [[강남구]](현재의 [[강남구]], [[서초구]]), [[강동구]](현재의 [[강동구]], [[송파구]]), [[과천시]] 등 주로 아파트 단지들이 밀집해 있는 중산층 이상 주거 지역 등에서 1위를 차지한다.[* 이 지역들은 앞에서 말한 서울 서남부 지역과는 반대로 1990년 [[3당 합당]] 후 민자당 - 신한국당이 들어서면서 자연스럽게 보수 정당 텃밭 지역이 된다. 물론 강남구, 서초구 한정이다. 호남 출향민들이 적었던 강남, 서초에서는 김대중 후보가 아예 3위로 밀렸고, 이후 2차례의 대선에서도 부진했다.][* 의외로 [[용산구]]에서는 김대중 후보가 1위, 노태우 후보가 2위를 차지했다. 김대중 후보는 한강로동과 북부 대부분을 가져갔고 김영삼 후보는 이촌1동을 확보한 반면, 노태우 후보는 서빙고동을 획득했다. ] 노태우 후보는 경기도 및 수도권 위성도시 지역 대부분에서 1위를 차지한다.[* 그나마 김대중이 승리한 지역이 서울의 위성도시이고 호남 인구가 많았던 [[성남시]]와 [[광명시]]이다. 김영삼의 경우 강남3구에서 승리한 것과 비슷하게 부촌인 [[과천시]]에서 승리했다.] [[성남시]], [[안양시]], [[광명시]], [[부천시]], 과천시 등 서울 인근 지역에서는 35% 이상의 지지를 받지 못했으나 [[파주군]], [[포천군]], [[김포군]], [[연천군]], [[가평군]], [[양평군]], [[여주군]], [[이천시|이천군]] 등 경기 북부와 동부에서는 50%가 넘는 득표를 했다.[* 1987년은 [[분당신도시|분당]], [[일산신도시|일산]] 등 수도권 신도시들이 생기기 이전이었다. 현재 도시화가 이뤄진 이들 지역이 당시에는 농촌이었고, 성향상 해당 지역들의 표심은 전통적으로 보수 초강세였다. 그나마 성남의 경우 분당은 생기기 전이지만 지금의 중원구, 수정구 지역은 서울 위성도시로서 개발되었던 시기여서 그나마 김대중이 승리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분당과 일산 등 수도권 신도시들을 처음 만든 게 노태우다. 물론 당시 수도권으로 몰리던 인구를 커버하기 위해 좋든 싫든 지어야 하는 판국이었다.] 김영삼 후보는 [[과천시]]에서 38% 득표율을 기록하면서 PK지역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위의 지역별 득표율을 보면 한 가지 주요한 특징이 발견된다. '''부산, 경남과 광주, 호남 지역에서 김영삼(호남), 김대중(영남)[* [[영남 vs 호남|영호남 지역감정]]이 매우 극심한 시절이어서 경상북도에서는 김대중 득표율이 김종필 득표율보다 낮았으며, 그 다음 14대 대선에서는 전국 4위 득표율을 기록한 [[박찬종]]보다도 표가 덜 나왔다.]의 득표율이 노태우보다 낮았다.''' 특히 호남 지역의 경우 김영삼의 득표율이 5공화국의 후계자인 노태우보다 낮았다는 사실은, 김영삼과 김대중 지지층의 골이 돌이길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지역 맹주에 대한 절대적인 지지를 반영하고 있었다. 87년 대선을 기점으로 한국 정치사는 지역맹주간의 권력투쟁으로 요약되며, 다음년도 88년 총선과 3당 합당을 거치면서 더욱 격화된다. 3당 합당을 통해 영, 호남 지역구도가 완성되었지만 본격화된 시기는 87년 대선으로 이 때부터 정치인은 지역구 당선과 대통령 선거 승리를 위해 지역감정을 선거전략의 제1순위로 올려놓기 시작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